종이는 천년을 견디고 비단은 오백년을 견딘다고 한다. 닥나무를 삶아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어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는 등의 아흔아홉 번의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우리의 전통종이인 한지 이야기이다. 이리 많은 손길을 거친 한지는 그 강도도 질겨서 창호지와 벽지는 물론 반짇고리나 함 등의 생활용품으로도 사용되어 우리 내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지금은 한지를 사용하는 곳이 한정적인데다가 중국산에 밀려 국내산 한지는 점차로 사라져가고 있는 중이다. 기계로 하루에 1톤을 가공할 수 있는 반면 똑 같은 양을 사람의 손으로 하면 2-3명이 6개월이란 기간을 소요하게 된다. 따라서 원료도 싸고 제조과정도 짧은 중국산 공장제조 한지가 국내에서 소요되는 한지시장을 잠식했다. 아직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국내한지는 가내수공업수준의 일부 장인으로 연명하지만 이것도 이어갈 사람이 없어 우리 전통의 수공 한지는 더 이상 보기 어렵게 되었다.

국내 수공한지는 추위와 더위를 견딘 국내산 닥나무를 사용하여 힘이 있고 찰지며 방망이로 두들겨 종이를 평평하고 치밀하게 만드는 후처리가공으로 질기고 생명력이 길다. 그런데 수입산 한지는 삼한사온의 혹독한 추위를 겪으며 자라난 나무가 아닌지라 힘이 없고 기계로 가공하여 방망이로 두들겨 내놓은 국산 한지의 강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탑이나 묘에서 발견된 천년이 지난 종이를 보면 아직까지 뽀얀 종이의 형체를 가지며 필체가 선명하여 놀라울 지경이다. 이처럼 놀라운 생명력을 가진 우리 고유의 종이가 사라져 가는 현장이 안타깝다. 먹을 갈고 한지위에 가지런히 쓰인 붓글씨나 수묵화가 만들어내는 우리 고유의 예술이 보존되려면 명품을 만드는 기능인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행위가 가능하도록 하는 전반의 제조기능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그 기능의 보유를 보호하고 이를 전수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한지를 바른 창을 통해 부드럽게 들어오는 햇살을 품어낸 방안에 온화함은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비록 한지가 포장지로 전락하여 쓰임이 적다고 하지만 자동차필터로, 납골함, 인공피부, 무균지, 반도체 절연지, 수술복 등의 다양한 분야로 개발되고 있음을 볼 때 전통 한지 제조기술은 공장 제조기술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가가치를 가져오게 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지금 고생고생해서 만든 한지의 매출로 한 달에 200만원을 벌기 어렵다고 하지만 조금만 버티면 반드시 그 이상의 가치로 한지의 가치를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므로 한지 수공기술을 가진 사람들에게 조금만 더 참으라는 응원을 보낸다. 그리고 뜻있는 젊은이들이 한지에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 모니터로 보는 순식간에 사라지는 글자말고 한번 쓰면 천년이상 글자를 전할 수 있는 한지는 분명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가치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용훈 논설위원(국민정치경제포럼 대표)